단편 B / May you keep it close
sample 2022. 4. 15.
  • 단편 B 타입. 한정된 상황에서의 주된 심리 묘사, 소량의 대화,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어 가는 것이 인물의 심리인 경우.
  • 본 샘플은 MMORPG FF14 칠흑의 반역자 5.3까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손아귀에 있는 것을 이리저리 굴려 보았다. 이제는 눈에 담지 않아도 그림을 그리듯 그것의 윤곽을 떠올릴 수 있었다. 태초부터 결정이 품었던 결에 반역하는 단면은 제멋대로였다. 손에 든 것의 표면은 거칠었으나 투박한 손에 상처를 남기기엔 역부족이다. 색은 본디 순백이었겠지만, 마력과 에테르를 흠뻑 빨아들여 이미 그 고결을 잃었다. 칠흑의 가까운 보라빛을 머금은 백성석. 눈을 감으며 이것의 출처를 떠올리려다가 이내 그만둔다. 왜냐하면…….

 

 손에서 희롱당하던 그것을 책상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그리고 검지로 윗면을 지그시 밀어 보았다. 여러 면들이 모여 만든 뾰족한 교차점을 지지점으로 만들어 손가락 하나로 아슬아슬하게 중력을 거슬러 세워 본다. 상냥하게 찾아 들어오는 노르브란트의 태양광이 살짝 투명한 조각을 관통하고, 볕이 지나간 자리에는 옅은 보랏빛이 그림자로 진다. 이건 명백하게 유품이다. 누군가의 죽음. 그것이 실체화되어서 눈앞에 있다. 심지어 만질 수도 있다. 잔인한 형태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가 누구인가. 고인을 떠올리자 마치 손으로 들어올린 모래더미처럼 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꼭짓점을 지그시 누르고 있던 검지 손가락을 슬쩍 떼자 조각은 힘없이 쓰러졌다. 영웅은 그것에서 손길을 거두고 책상에 엎드려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세계를 구원한 자의 동공에 애처로운 편린이 서린다.

 

 이세계의 시인은 진혼곡을 올리고 난 뒤 그것에 명왕의 기억이 봉인되어 있다고 말했다. 거기서나 여기서나 오묘한 사내였다.

 

 ‘부디 가까이 지니길. 그리고 언제나 기억하길.’

 

 영웅은 그것을 흔들림 없이 바라보며 사념에 젖다가, 이내 결심한 듯 그것을 낚아채고 어디론가 향한다. 발길이 향한 곳은 크리스타리움의 연금술 의료관이었다. 영웅은 에메시아에게 그것을 가능한 곱게 가루내 줄 것을 부탁했다. 호기심을 미처 다 지우지 못한 얼굴을 못 본 체 하느라 조금 곤란했지만, 그녀는 군말없이 영웅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거주관에 돌아와 반듯하게 접힌 약포지를 펼쳤다. 고운 가루는 햇빛을 받아 반사광을 내며 눈이 시리도록 반짝거렸다.

 

 에오르제아 동쪽에 위치한 오사드 대륙에서는 시신을 매장하는 것 말고도 불로서 죽은 이의 유골을 가루로 화장시키는 장례 풍습이 있다. 유골을 가정 내에서 정성스럽게 모시거나, 간혹 토지가 작은 나라에서는 그것을 바다나 강에 뿌리기도 한다. 거기서 기인한 생각이었다. 영웅은 식수를 따라 놓은 밋밋한 유리잔에 보랏빛 가루를 털어 넣었다. 한 톨도 놓칠 세라 아주 조심스럽게.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없었다. 유품을 갈아 마신다는 미친 풍습 또한 원초 세계에서도, 제1세계에서도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봉인되어 있다던 기억을 깨우기 위해 몸에 가까이 지니며 밤을 지새기를 벌써 엿새째. 그저 이젠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었다. 떠올린 최후의 방법은 순 주먹구구식이었다. 이러면 된다는 어떠한 근거도 찾지 못했다. 긴 고민도 없었다. 충동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에 어떠한 의구심도 없다. 영웅은 유리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묵은 숙원이 가진 중함에 뒷맛이 껄끄러울 줄 알았으나 의외로 목넘김은 매우 부드러웠다. 혹시나 낙오된 입자라도 있을까 엄지로 아랫입술을 진하게 쓸어 입에 넣었다. 이걸로 된 거야. 당신과의 약속 지켰어. 몇 분만 있으면 조각들은 혈관을 타고 전신을 돌 것이다. 돌고 돌다가 심장에라도 박히면 아주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이제 그는 가장 가까이에서 자신의 모험을 지켜봐 줄 수 있었다.

 

 영웅은 책상 위에 널린 것들을 채 치우지도 않고 바로 이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들숨과 날숨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옅은 졸음이 몸 위로 은근하게 포개졌다. 아아……, 왠지 찬란하고도 아름다웠던 도시와 그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아주 길고 긴 낮잠이 될 것이다. ■

1 2 3 4 5 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