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편 & 단편 A / 冬柏
sample 2022. 4. 15.
  • 중장편 및 단편 A 타입. 인물의 심리와 상황 묘사, 이어가는 대화,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기승전결의 형태.
  • 논CP / OC(드림주) 캐릭터 서사

 

 

 

 

 

 “어르신……!”

 

 다다미 문을 벌컥 열고는 엎드려 벌벌 떠는 하수인의 모습을 보고 타다요시는 직감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산파를 부른 지 한 시간도 채 안 됐을 때였으니 원흉은 어느 곳에 있을지 짐작했다. 타다요시는 아연실색한 얼굴의 하수인에게 무슨 일이느냐고 추궁할 필요도 없이 벌떡 일어나 무거운 걸음으로 부인의 침소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까지는 얼추 사산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목적지로 향할수록 어렴풋이 들려오는 우렁찬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에 당주는 일순 어리둥절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따라온 하수인이 요를 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처럼 안절부절 발을 구르며 연신 ‘아이고…… 아이고…….’ 하고 죽는 소리를 내었기에 불길함은 깨끗하게 가시지 못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오든 눈에 보지 않고서는 성에 차지 않을 걸 알기에 그는 더 빠른 걸음으로 목적지까지 걸었다.

 

 침소의 문을 열자 눈에 들어온 것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자신의 아내와 옆에서 아내의 이마를 연신 닦아 주는 그녀의 하녀, 멀리서 온 노년의 산파.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내의 옆구리에서 마치 내가 방금 잉태되었노라고 천하에 알리려는 듯 울어재끼는 갓난아기가 있었다.

 

 “무슨 일이오.”

 ”때마침 오셨군요……. 저희의 결실이 고맙게도 건강하게 태어나 줬답니다. 안아 보셔요.”

 

 타다요시의 불같은 시선이 애꿎은 하수인에게로 향했다. 불똥이 제게 튈 걸 느낀 사내는 고개를 수그렸다. 날이 번뜩거리는 서슬퍼런 검 앞에 천기누설을 입에 담아야만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타다요시는 바들바들 떠는 사내를 제치고 아내에게 다가가 물었다.

 

 “하인이 놀라서 한걸음에 달려왔소.”

 “……어여쁘지요?”

 

 아내는 여의치 않고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을 얻은 얼굴로 울긋불긋한 갓난아기의 뺨을 만졌다. 침묵과 핏덩이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것으로 지아비는 그녀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아내는 그의 황소 고집을 꺾을 사람은 이 마을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린다고 해서 가려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기어코 입을 연다.

 

 “귀여운 공주님이랍니다. 아비 품이 그리워 울고 있으니 안아 주셔요…….”

 “그게 무슨 소리오!”

 

 타다요시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아카이하에서 여자 아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아내는 타다요시의 고함을 상쇄하려는 듯 아이의 뺨을 여전히 어루만지며 주문처럼 다정한 말들을 속삭였다. 그러나 무색하게도 포대기를 헤치는 타다요시의 손길은 거칠었다. 솜털이 돋아난 여린 살에 겨울의 찬바람이 닿았다. 아기를 내려다보는 타다요시의 얼굴은 목부터해서 점점 울그락불그락 달아올랐다. 그리곤 괴성을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가 자고 있던 외날검을 깨우는 건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검을 뽑아들며 도깨비처럼 눈알을 부리는 타다요시를 보며 그 자리에 있던 하수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르신……!”

 “나리!”

 “시끄럽다! 감히 어떻게……!”

 

 갓난아기는 자기에게 닥친 미래를 알고 있던 것일까. 세상이 무너질 듯 울어댔다. 아내는 출산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잽싸게 아이를 안아들었다. 언제라도 칼부림에서 아이를 구해내겠다는 투지가 담긴 몸짓이었다. 타다요시는 그런 그녀의 코끝에 예리한 검을 들이댔다.

 

 “부인에게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오.”

 “왜 이러시는 겁니까. 모녀에게 칼을 거둬 주십시오!”

 “아카이하 가의 첫 자식으로 절대 계집이 나올 수 없소. 처녀가 아닌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소, 부인!”

 “저는 일평생 한 사람만 바라보고, 한 사람만 사랑해 왔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한 남자의 여자로서, 연인으로서, 아내로서 도리를 다해 왔습니다. 한 번도 이를 어겨 본 적이 없습니다! 허나, 지금 서방님은 남편으로서, 아비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거짓말 마시오! 도리를 다했으면 계집이 아니라 사내를 낳았을 것이오. 저것과 당신은 가문의 수치란 말이오!”

 

 칼 앞에 서 있는 것은 그녀들일 텐데도 타다요시는 주마등을 보고 있었다.

 

 어린 싹일 때부터 배워 온 주군에 대한 충심과 선대에서부터 몇 대를 걸쳐서 이어온 가문의 명성, 그리고 선대가 준 가문의 숙제. 타다요시의 아버지는 그가 어려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입이 닳도록 이야기해 왔다. 그리고 타다요시는 그것이 자기가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루어야 될 사명이라고 여겼고, 거기서 자신이 이 가문의 남자로 태어난 이유를 찾았으며, 그 신념 하나만으로 이 시간까지 살아 왔다. 곧 탐스러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무얼 위해 살아 왔나. 무얼 위해 싸워 왔나. 무얼 보고 달려 왔나. 타다요시는 눈앞에 있는 여자 때문에 지난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타다요시가 검을 들어올렸다. 하수인들의 곡소리가 들린다. 분노의 불길에 자신의 몸을 맡긴 그에게 그런 소리가 닿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배우자로 맞았던 아내의 흔들림 없는 곧은 눈빛을 보았다. 그것은 그가 그녀를 아내로 맞은 연유였다. 우습게도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니,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일지도 몰랐다. 다만 확실한 건 애착쯤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어쨌건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었고, 아카이하 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검을 쥐고 있는 타다요시의 손이 떨렸다. 차마 검으로 내리칠 수는 없었다. 타다요시는 검을 도로 넣었다.

 

 “보름 안에 아이를 두고 이 마을을 떠나시오. 아카이하 성(姓)도 버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이전에 아카이하 타다요시의 아내였다고 말하지 마시오. 나도, 아이도 모른 체하고 사시오. 죽은 사람처럼 사시오. 그럼 목숨만은 살려드리리다. 내가 부인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온정이오.”

 

 기어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열달을 품고, 방금 제가 배 아파 낳은 핏덩이를 두고 어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는가. 제 자식을 영영 보지 못할 거라는 직감에 한 번 미어진 가슴이, 아직 이름도 붙여 주지 못한 자식의 앞날을 생각하니 두 번 미어졌다. 몇 갈래로 찢어지는지 모를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울음이란 첫 호흡을 하는 갓난아기가 훗날 아카이하의 묵은 숙제를 풀게 될 이였다.

 

 

 

* * *

 

 

 타다요시는 일사분란하게 일을 처리했다. 아기는 건강하게 태어났으나 아내가 출산 후에 병중으로 누워 있다고 소문을 내라고 하수인들에게 시켰다. 아기가 태어난 지 나흘째 되던 날엔 마을 거리에서 타다요시의 아내가 위중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드레째 되던 날에 아카이하 당주는 아내의 가짜 장례식을 치뤘다. 아내는 장례식을 치르기 전날, 동이 트기 한참 전인 깊은 새벽에 자신의 식솔로 온 하인 두 명만 데리고 마을을 떠났다. 아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부리고, 혼인 후에도 아카이하 집안에 제일 먼저 들였던 하인인 ‘타마(玉)’라는 여인은 아카이하 집안에 남았다. 이유는 이러했다.

 

 ‘원래부터 아카이하 가문을 위해 일했던 이들은 사내만 키워 왔기에 여자아이를 키우는 법을 모를 거예요, 마님. 그리고 태어난 자식이 여자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되도록 없기를 어르신도 바라시겠지요. 그러니 제가 이 아이의 보모가 되겠습니다.’

 

 타다요시의 성격에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산파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눈을 감아도 그림처럼 선명한 것이요, 자신이 일평생 모셔 왔던 안주인의 바람 또한 이루기 위해 타마는 일찍이 선수 쳤다. 그리고 당주는 그것을 허락했다. 아내가 끔찍이 아끼던 하인이 제 주인을 따라 가지 않고 남겠다고 했으니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으나, 그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타마!”

 “도련님! 어딜 다녀오셨기에 이제 오시나요! 어르신이 외출하셔서 망정이지. 아시기라도 했다간……!”

 “동네 아이들이랑 같이 눈싸움 놀이를 했어. 검술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어!”

 “이 타마를 봐서라도 몰래 다녀오는 건 그만두셔요. 도련님과 저, 저희 둘 다 큰일 날 수도 있답니다. 밖에 나갈 땐 꼭 어르신과 같이 가셔야 해요.”

 “그치만 아버지와 외출하면 절대 동네 아이들이랑 놀지 못하게 하시는걸……. 아이들도 나를 모르는 사람인 척하면서 눈도 마주치지 않는단 말이야.”

 

 좀처럼 바깥 세상을 구경할 수 없는 어린 아이의 투정을 듣자하니, 안쓰러운 감정이 사무쳐 타마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 여섯살배기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이 집안에서 태어난 것밖에 하질 않았는데. 그게 죄라도 된 것마냥 죄인처럼 숨어 지내야만 했다. 타마는 아이를 다그치는 것을 그만하기로 했다. 대신 또래 아이들과 같이 노는 게 그리 재미있냐고 물었다.

 

 “응. 근데…….”

 “무슨 일이시죠, 도련님?”

 “아이들이 내 손을 보더니 징그럽다고 놀렸어.”

 “손이요?”

 

 그녀는 아이의 손을 냉큼 자기 앞으로 가져가 살폈다. 한참 눈을 만지다가 왔는지 차디찬 손이었다. 고사리같이 작은 손은 여기저기 부르트고, 마디 중간마다 굳은살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것은 아카이하 가의 무게에 짓눌려 생긴 거나 다름없었다. 타마는 말없이 아이의 두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그러나 보모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아이는 뾰루퉁한 얼굴로 바닥을 내려보고 있었다. 타마는 당주가 없을 때만이라도 아이가 웃었으면 했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본 적은 없으나 어린 나이부터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여섯 해를 키워 왔다. 부모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하고 있었다.

 

 “우울할 땐 꽃을 볼까요, 츠바키 도련님?”

 “으응? 꽃?”

 “네. 도련님의 어머니께서는 마음이 심란하실 때 꽃을 보며 마음을 달래셨답니다. 도련님도 보시면 마음이 조금 풀리실 거예요. 자, 정원으로 가요.”

 “겨울에도 꽃이 피는 거야?”

 “매일 단련하시느라 정원을 둘러 볼 겨를이 없으셨군요? 혹독한 겨울에만 아름답게 피는 꽃이 있답니다.”

 

 얼음장 같은 손을 빈틈없이 꽉 붙잡으며 타마는 아이를 정원에 데리고 갔다. 정원은 그녀의 주인의 손으로 잘 가꿔졌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타다요시는 아내의 손길이 가장 많이 닿은 장소라는 이유로 정원을 관리하지 않다시피 했다. 타마만 가끔 티 나지 않을 선에서 조금씩 조금씩 그곳을 관리해 왔다.

 

 오직 그녀만이 이 집에서 제 옛 주인의 의지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것의 결정체는 이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타마는 남몰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의 옆에 있을 수 있는 동안 많은 것을 이야기를 하고, 많은 것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 꽃도 그중에 하나였다.

 

 겨울의 칼바람에도 끄떡없는 동백은 오로지 개화에 충실했다. 마치 아름답기를 제 사명인 것처럼. 소복이 쌓인 새하얀 눈에서 붉은 꽃은 참으로 고고했다. 동면의 계절에 모습을 드러내는 꽃이 퍽 신기했는지 아이는 보모의 손을 놓고 제 키보다 큰 동백나무 앞에 섰다.

 

 “우와, 신기해! 예쁜 꽃이네.”

 “동백꽃이라고 한답니다. 도련님의 이름도 동백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내 이름은 유키토야. 가끔 타마는 내 이름을 헷갈려.”

 

 아카이하 유키토(雪人). 이 가문의 20대 당주가 될 이름이었다. 거짓으로 점철될 운명인데도 이름만은 눈 설(雪)자를 써서 청렴을 부르는 타다요시의 잔인함을 당사자는 모르고 있었다. 아이는 벌써 여섯 살이나 되었지만 외부 접촉도 최소한으로 줄인 탓에 아직 남과 여의 개념도 없었다. 알고 있다고 해도, 아비 밑에서 무사로 자연스럽게 길러지고 있어기에 자신의 성별에 의문을 가질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알아야 할 것이다. 타다요시와 타마는 연극을 해 왔던 것이라고. 어른들은 언제나 아이에게 거짓말을 해 왔다고.

 

 지금은 때가 아니다. 타마는 아이의 귀여운 투정에 빙긋 웃고만 말았다.

 

 “도련님의 어머니께서는 이 꽃을 가장 좋아하셨답니다. 모진 겨울에도 볼 수 있는 유일한 꽃이니까요. 그 꽃과 참 잘 어울리는 분이셨어요. 꽃에게는 저마다 꽃말을 가지고 있는데 동백꽃의 꽃말은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예요. 청렴, 절조, 신중……. 그런 꽃말도 가지고 있죠. 그분은 끝까지 동백의 꽃말처럼 사셨어요. 제가 확신해요.”

 

 “청렴? 절……조? 너무 어려워. 처음 들어.”

 “지금은 어려운 게 당연해요. 하지만 훗날 츠바키 님도 알게 되실 거예요. 단어가 어려우면 쉬운 이야기를 해 볼까요? 이 꽃에 얽힌 전설을요.”

 “응. 나 이야기 좋아해.”

 

 어떤 젊은 부부가 섬에 살았다. 아이 없이 단 둘이 살고 있었는데, 남편은 어부였다. 하루는 고기를 잡으러 남편이 바다로 나간 사이에 집에 강도가 들어 부인을 헤치려고 했고, 부인은 남편이 있는 바닷가를 향해 도망가다 그만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여인이 엎어져 있는 걸 보았고, 다가가서 보니 자신이 사랑했던 부인인 걸 알고 통곡하였다. 남편은 부인을 섬에 잘 묻어 주었다. 그러나 남편은 사별의 아픔에 부인을 잃었던 섬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뭍으로 떠났다. 어느날, 남편은 부인이 너무나 보고 싶어 섬에 다시 돌아와 보니 무덤에는 어떤 나무가 자라고 붉은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동백이었다. 꽃은 남편에게 말했다. 난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요. 당신만을 사랑해요.

 

 이야기를 마친 타마는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툭 건들면 눈물을 왈칵 쏟아낼 것처럼 눈가가 빨갰다. 오, 도련님. 타마는 작게 중얼거리면서 사랑스러운 아이의 눈가를 엄지 손가락으로 쓸었다. 아이는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을 알기엔 너무 어렸으니 아이에겐 전설 속에 나오는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가장 슬프게 느꼈다. 마치 얼굴도 모르는 제 어미를 전설 속 아내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듯.

 

 “바람이 차서 울면 얼굴이 따가우실 거예요. 무인은 울지 않아야죠? 응? 그래도 주인님이라면 츠바키 님에게 꼭 이 전설을 들려 주셨을 거예요. 왜냐하면…… 주인님이 저 멀리 떠나시기 전날 밤에 도련님의 이름을 츠바키로 지어 주셨거든요.”

 “오늘은 어머니 이야기를 많이 하네, 타마. 저번에 어머니는 어디 가셨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가 엄청 화내셨어. 한 번만 더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간 집 밖으로 못 나가게 하시겠대.”

 “…….”

 “타마, 나 어머니가 보고 싶어……. 동네 아이들은 다 어머니가 계시는데 나는…….”

 

 타마는 아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숨 막혀. 작은 투덜거림이 들려도 타마는 끌어안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주인님이 계셨으면 하셨을 것들을 이 타마가 열심히 할게요.”

 

 

 

* * *

 

 

 그 뒤로도 타마는 부재중인 제 주인을 향한 충(忠)을 주인의 자식에게 다했다. 큰 탈 없이 시간은 흘렀고 츠바키도 훌쩍 컸다. 타마는 익숙하게 소녀의 머리에 가위질을 하고 있었다. 문안 인사를 하러 가기 전, 머리를 자르는 게 그녀들의 매일 아침 일과였다. 타다요시는 항상 제 등 뒤에 바짝 서 있는 진실에게 쫓겨 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장손이 사실은 여자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그래서 가문의 명성이 실추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듯. 타다요시는 타마에게 매일 아침마다 제 딸의 머리를 잘라 주라고 명했다. 이미 짧게 쳐서 자를 것도 없는 머리에 타마는 거의 시늉만 하듯 가위질을 했다.

 

 “타마.”

 “네, 도련님.”

 “요즈음 들어 가슴이 답답해. 칼을 휘두를 때 방해돼.”

 

 타마는 가위질을 멈추고 츠바키의 등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가슴에는 비단천이 몇 겹으로 단단하게 둘러져 있었다. 무엇을 가리기 위함인가. 그건 아카이하 가의 거짓이었다. 그릇됨이었다.

 

 타마는 말없이 다시 가위질하는 시늉을 했다. 의미없는 가위 소리가 소녀의 귓전을 두드렸다. 가위 소리가 싫었다. 그러나 소녀는 군소리를 하지 않고 입매를 다졌다. 흐릿하게 보이는 제 운명에 물음표 하나 달지 않고 순종하고 있었다. 가위 소리가 멈췄다. 타마는 깨끗하게 빨래해 둔 새하얀 나가쥬반*(기모노 안에 입는 옷)을 소녀에게 입혀 주었다. 타다요시를 만날 준비가 끝났다.

 

 츠바키는 발소리를 죽이며 마루를 걸었다. 여명이 들 때 하루를 시작하는 건 아주 어렸을 때부터 했던 일이라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건 오로지 자신의 아버지였다. 타다요시는 명실공히 이 근방의 최고의 무사였고, 명망 높은 가문을 이끄는 당주였으며, 소녀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본디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가 이리도 어려운 건지. 원래 아버지라는 사람이 제 자식을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였던가.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렇다고 피할 구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녀는 아버지 침소의 문 앞에서 그를 불렀다.

 

 “아버지. 유키토입니다.”

 “…….”

 “들어가겠습니다.”

 

 다다미 문을 옆으로 밀어 열었다. 타다요시는 말끔하게 침구를 정리해 놓고 앉아 있었다. 츠바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방문을 닫고 타다요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유키토.”

 “네.”

 “너는 아카이하 가문을 이끌 무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성인식을 올리면 너를 내 뒤를 이어 근위대장에 앉힐 것이다. 미래의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잊지 말아라. 무사도를 지켜라. 그리고……. 우리 가문의 숙제를 너의 대에서 푸는 것이다.”

 

 행동거지를 조심해라.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말은 필요할 때 나와 보모 앞에서만 말하고 평소에는 침묵을 지켜라. 소녀는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그가 하는 말을 속으로 읊었다. 다 알아요. 너무나도 잘 알아요. 말을 할 줄 알게 됐을 때부터 츠바키에게 매일같이 하는 말이었다. 벌써 십수 년을 들었으니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밖으로 지긋함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간 이 집안에 동화된 듯 소녀 또한 거짓을 연기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벙어리는 아니지만 벙어리같이 행동하는 것처럼, 그밖에도 많은 것을……. 소녀는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엄중한 가면을 쓰고 묵념했다.

 

 츠바키는 훈화를 다 듣고 나갈 요량으로 일어섰다. 타다요시가 일어서는 소녀를 매서운 눈으로 응시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그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서렸다. 타다요시는 “유키토!” 하고, 소녀의 거짓된 이름을 크게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고함은 궂은 날의 벼락처럼 소녀는 깜짝 놀라 겁에 질린 얼굴로 타다요시를 돌아보았다.

 

 “네 놈! 그게 무엇이냐!”

 

 츠바키는 타다요시가 노려보는 시선을 따라 어깨 너머 쪽을 살폈다. 순백 나가쥬반의 하반신 쪽에 혈(血)이 묻어 있었다. 하얀 천에 퍼진 빨간 자욱은 겨울 눈 위에 피어난 동백처럼 시선에 걸리기 쉬운 대비였다. 츠바키에겐 혈흔을 볼 정도의 상처를 낸 기억이 없다. 뭣보다 그런 상처는 제 아버지가 노발대발하며 편태까지 꺼내들게 만들 만한 방아쇠가 되지 못했다. 검을 만지다 보면 언제든 몸이야, 상할 수 있는 것이기에. 무사는 언제나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깟 피쯤이야…….

 

 편태가 허공을 가르며 내는 바람 소리가 살벌했다. 츠바키는 아랫입술을 하얗게 질리도록 깨물었다. 피가 방울방울 맺히도록 깨물었다. 목소리가 문 밖으로 나가 집안 사람들이 듣기라도 한다면 아버지의 회초리질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잇새 사이로는 저 자신에게 들릴 듯 말 듯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프다. 영문을 모르고 맞는 편태는 더더욱 불에 달군 것 같다. 맞은 자리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편태를 딱 열 번 휘두른 타다요시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버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딸에게 명령한다. 당장 방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거라. 소녀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절뚝거리며 제 방 문을 여는 츠바키를 보고 타마는 놀라 튀어나갔다.

 

 “어르신 고함 소리가 들리던데. 괜찮으세요, 도련님? 무슨 일이에요?”

 

 츠바키는 대꾸할 여력이 없어 그저 정리하지 않은 요 위로 쓰러지듯 엎어졌다.

 

 “약 발라 줘, 타마.”

 

 매를 맞는 게 아주 뜸한 일은 아니었는지, 타마는 소녀의 방 안 서랍장에서 바르는 약을 꺼내 왔다. 타마는 옆 이불을 정돈하다가 깜짝 놀라 말했다.

 

 “도련님……!” 소녀는 요에 고개를 파묻었다.

 

 “얼른 방으로 가서 옷 갈아 입으래. 이게 뭔지 모르겠어. 나 뭘 잘못한 걸까, 타마?”

 “아니요. 애기씨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으셨어요…….”

 

 타마의 목소리에 물기가 느껴졌다. 애기씨? 소녀는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려 타마를 보았다. 저 얼굴은…… 아마 미안해하는 얼굴이다.

 

 “츠바키 님은…… 사실…… 여자이셔요.”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검 쥐는 것밖에 모른다고 해서 천하의 바보는 아니야.”

 “여자들은 보통 아이를 가질 수 있을 때 이렇게 한 달에 한 번 달거리를 한답니다.”

 “…….”

 

 한 달에 한 번 이래야 한다니. 귀찮네. 츠바키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타마가 나가쥬반을 걷어 올렸다. 츠바키의 종아리는 벌써부터 시퍼렇게 싸리나무 줄기 모양대로 멍이 들고 있었다. 타마는 땡땡 부어 오른 종아리에 약초를 짓이겨 만든 외용약을 약지로 부드럽게 펴발랐다.

 

 타마는 약을 다 발라 주곤 서랍장 깊숙한 곳에서 옷을 꺼내왔다. 잘 개켜진 기모노가 츠바키의 눈앞에 드리워졌다. 타마는 의기소침한 소녀에게 무릎을 내주어 밸 수 있도록 했다. 어머니란 존재의 손길이 이런 걸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보모의 손길에 츠바키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맡겼다.

 

 “이 기모노는 뭐지?”

 “마님께서 좋아하시던 기모노예요. 이 기모노를 입으면 오늘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예요, 애기씨.”

 

 아주 새빨간 기모노였다. 츠바키는 말했다.

 

 “동백꽃 색 같아. 어머니가 보셨으면 좋아하셨겠지.”

 

 츠바키는 눈을 감았다. 타마는 츠바키에게 붉은 기모노를 입혀 주기 전까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기나긴 이야기를 했다. 아카이하 가가 세간에 숨겨 온 이야기, 츠바키의 탄생, 가짜 장례식, 어머니의 출가. 그 모든 것을, 마침내. 끝엔 타마가 제 주인에게 들었던 마지막 말을 해 주었다.

 

 츠바키가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나 대신 타마, 너의 모든 것을 쏟으렴. 내가 네게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츠바키는 생각한다. 신념. 그게 뭐지? 신념은 무사의 정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굳게 믿는 마음. 무사로서는 자신의 주군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죽음이 닥쳐 오면 기꺼이 주군을 위해 죽을 수 있도록 충성을 다하는 게 가장 기본의 기본인 무사도였다.

 

 어머니는 이걸 말씀하신 걸까? 무얼 믿어야 하지? ……타마, 올바른 신념이란 뭐야?

 올바른 것을 믿는 마음이지요.

 무엇이 올바르지? 어머니가 가르쳐 주셨다며. 답을 알고 싶어.

 마님께서는 사람들이 백 명이 있다면 백 개의 신념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답은 각자 저마다 찾아야 한답니다.

 그럼 타마의 신념은 뭐였는데?

 마님이죠.

 난 무엇을 믿어야 하지? 이 집안에는 내가 믿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 태어나기 전부터 점지된 주군을 믿는 게 올바른 신념일까? 그렇다면 검이 불타오를까? ……아니. 그건 아니라는 건 알아.

 

 “어머니라면…… 답을 알고 계실까.” 츠바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