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sample 2022. 4. 15.
  • 편지 타입.
  • 본 샘플은 MMORPG FF14 칠흑의 반역자 5.3까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안녕, 에메트셀크. 그리고 하데스.

 

 여긴 벌써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어. 언젠가 밤이 돌아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제1세계 사람들은 빠르게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저마다 제 자리에서 힘을 내고 있어. 당신이 그토록 끔찍해했던 우리의 끈질김이야. 놀라울 정도로 끈질기게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어.

 

 나는 그후로 동료들과 함께 무의 대지를 모험하고 있어.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여전히 우리에겐 버거운 숙제인가 봐. 봐, 거기서 당한 부상 때문에 동료의 감시하에 며칠째 꼼짝없이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거. 특히 알리제와 린이 걱정이 많은 눈치야. 병문안을 빌미로 내가 잘 쉬고 있나 자주 보러 오거든. 그 둘은 지금은 다행히 다른 일을 보러 갔어. 그리고 짬이 나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지.

 

 솔직해져 보자면 그들 몰래 당신이 만든 도시에 다녀왔어. 당신이 알까 모르겠지만, 팬던트 거주관의 창은 크거든. 뛰어내리면 그만이야. ……이 정도도 못해서야 어디 가서 영웅 노릇이나 하겠어?

 

 그 도시, 엄청 크더라. 구경하다가 쉰다고 앉아 있는다는 게 깜빡하고 잠들어 버렸어. 꿈에 당신이 나오더라고. 여전히 심술궂은 얼굴로 깜빡 잠든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곤 사라졌지. 그래, 변명이라도 하려고 쓰는 편지야. 모험가가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서신은 많이 써 보긴 했지만, 사적인 편지는 아직도 어려워. 글을 쓰는 건 내 주특기가 아니거든. 알잖아.

 

 우리, 못다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 내가 찾는 답이 당신에게 있을 것만 같았어. 내가 이렇게 태어난 이유를. 이 길을 택한 이유를. 그런데…… 당장 바쁘다는 핑계로 많은 것들은 놓치고 살았다는 걸 이제서야 새삼 깨달아.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어. 이것 또한 모두 당신이 의도하지 않았을까, 하고.

 

 막상 그땐 몰랐는데, 나 잘 짜여진 각본의 배우더라고. 각본가는 당연히 당신이고 말이야. 어떻게 알았냐고? 크리스타리움에 있는 시인이 말해 줬어. 제1세계에 있는 밤의 주민들은 장례식 같은 특별한 순간에만 자신의 본명을 밝히는 것이 허락된대. 그래, 당신은 이런 결말도 예상하고 있었던 거야. 나를 보기 훨씬 전부터. 이상하리만치 지나치게 협조적이었던 당신을 떠올려. 당신과 그들의 자취를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맡긴 거였지. 혹시나 모를 다른 결말을 위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안 됐겠지. 딱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러니까 설령 당신이 지금 살아 있다고 해도 내게 답을 말해 주진 않았을 거란 뜻이지. 네 답은 네가 찾으라고, 혹은 내게 부탁하지 말고 스스로 기억해내라며. 그런 말만 했겠지. 왜냐하면 당신, 협조적이어도 묘하게 불친절하기도 했고……. 왜. 사실이잖아……. 이제 와서 발뺌할 건 아니지?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미련 없어. 주저앉지 않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가 생긴 거야.

 

 제1세계에도 여명이 찾아와. 황혼도 찾아와. 해와 달이 뜨고 지길 반복해. 오늘도 어김없이. 그러면 난 당신을 기억하지. 내게 잊지 말라고 하진 않았지만 잊지 않기도 하고 있어. 아주 착실하게. 상대를 잘 골랐다고,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겠네. 왜냐하면 한시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니까 마지막에 내게 그렇게 웃어 줬을 거 아니야. 이상하게 눈만 감으면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해. 정말 이상하게도 말이야……. 이런 나를 보고 있다면 날 만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할걸? 나도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펜으로 마구 그어져 알아볼 수 없다.)

 

 그런데 말이야, 에메트셀크. 우리,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해도 똑같은 결말을 선택했겠지? 응,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이미 알고 있으니까. 우린 이럴 운명이었어. 같은 시간선이 되풀이된다고 해도 운명은 우릴 가로질러 지나갈 거야. 뻔할 걸 물었네.

 

 아, 참. 거기서는 잘 지내고 있지? 끝에 가서야 안부를 묻는 거, 용서해 줘. 말했잖아. 글솜씨 없다고……. 뭐, 이름을 보아하니 거기서 잘 지내고 있을 것 같지만. 거기선, 부디, 이제 그만, 푹 쉬어. 죽음이 당신에게 구원이기를.

 

 앞일은 걱정하지 마. 말했지? 상대를 잘 골랐다고.

 

 

 

 

 

당신의 오래 전 친구이자 당신의 반역자가